1950년대 후반기~1960년대에 걸쳐 빠른 경제발전 속도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한 많은 국민들의 서울 상경으로 서울의 인구수가 급증하면서
무허가 불량건물도 급격히 늘기 시작했다.
1966년 미국 존슨 대통령이 방문을 하게 됐고 존슨 대통령의 환영식 영상에서
서울 판자촌의 모습이 방송으로 나가게 되었고
박정희 대통령은 이때부터 무허가 건물을 정리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서울 시장은 무허가 건물을 조사하기 시작 했고, 무허가 건물 리모델링 및 현재 경기도 성남에 대단지를 조성하여
주민들은 이주, 정착 시킬 방침을 세운다. 그로 대책 중 하나가 시민아파트 건립 계획이였고
1969년 1년만에 32개 지구에 406동 1만 5840가구분의 아파트를 건립하게 되었다.
그 당시 높은 건물들은 산중턱에 지어 멀리서도 잘 보여야 한다는 보여주기 식의
과시욕으로 무허가 판자촌을 허물고 아파트는 산중턱, 탄탄하지 않은 땅 위에 짓게 된다.
(부산의 옛 영주시민아파트 또한 산중턱에 지어진 모습.)
시민아파트는 좋은 취지로 시작 되었으나 과정은 그렇지 않았다.
서울 마포구 와우산 중턱에 짓기 시작한 와우아파트는 총24개동으로 천 1200가구 5000명이 입주 할 계획이였다.
모든 24개동은 한 건설회사가 시공한것이 아니고 여러 건설회사가 나누어 건설하게 되었다.
문제가 된 와우아파트 13~16동은 대룡건설이 맡게 되었고
대룡건설은 박영배라는 무면허업자에게 하청을 주게된다.
또한 대룡건설은 정부에서 받은 공사비중 일부를 가져가고
남은 금액 일부를 무면허 업자에게 주게 된다
그로인해 택지조성비,축대비 등을 제외하면 건축비가 평당 1만원도 안되는 금액으로
공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1969년6월26일 착공 6개월만인 12월26일에 서울 마포구 와우산 중턱에 완공되었다.
이후 많은 주거공간을 잃은 시민들을과 빠른 도시발전을 위해 빠른 입주를 시작한다.
그 결과..
1970년 4월8일 오전 6시 40분경 5층짜리 15동이 무너져 33명의 사망자, 38명의 부상자가 생기는
인명피해가 일어나고 말았다.
그리고 이 무너진 아파트가 아파트 아래 쪽에 위치한 판자촌을 덮쳐
판자촌에서도 1명의 사망자 2명의 부상자가 나왔다.
오전 6시40분.. 많은 사람들이 자고 있을시간이였고 많은 시민들은 피할 틈도 없이 사고를 당한것이다.
불행중 다행이였던것은 30개의 집중 15개의 집만이 입주가 되어있던 상태라 인명피해가 작았다고 볼 수 있다.
붕괴의 원인은 부실공사, 그 내부를 들여다 보면 당연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사고였다.
설계상 건물 하중은 ㎡당 280kg 이였지만 15동의 실제 하중은 ㎡당 600kg 이상 초과 되었던것이다.
당시 판자촌 사람들은 아파트의 입주권 조차도 살 수 없을 만큼 가난하기도 하였고
중간 입주권 브로커들로 인하여
아파트의 실제 입주자들은 돈이 있는 중산층 사람들이였고,
많은 가전가구들이 들어오게 된다. 그로 인해 하중은 초과가 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산비탈에 세우기 위해서는 철근 70개가 필요한데 7개만을 사용하여 기초를 삼았다.
콘크리트 배합비율 또한 불량이였다.
물의 양도 많이 섞었을뿐더러 불순물이 많은 하수도를 사용하여 탄탄한 벽이 되지 못하였고
기둥의 깊이는 겨우 2m, 암반이 아닌 부토(敷土)위에 세웠고 결국
4월에 지층이 내려앉아 건물이 무너지게 된것이다.
이로 인해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김현옥은 시장자리에서 사퇴를 하고
많은 관련자들은 구속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대룡건설이 맡은 13~16동 아파트는 모두 철거가 되었고 이전에 지어진 모든 시민아파트의
안전진단을 한 결과 총 405동중 349동이 보수가 필요한 상태였다.
15동이 무너진지 3개월도 되지 않아 와우아파트 다동뒤의 축대가 무너지는 사고가 났고
1984년 폭우로 인하여 와우산 일부가 무너져 내리면서 2동 두 집을 덮쳐 2명이 사망하고
3명이 중경상을 입기도 하였다.
계속 되는 사고로 차츰 철거가 되고
그나마 괜찮았던 건물은 보수를 시작하기 시작하였다.
1991년에 마지막에 남아 있던 3~5동 마저 철거가 되었다
현재 철거부지는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으로 여의도 시범아파트가 지어졌고 현재의 아파트 단지조성 시초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충격적인 사고에도 불구하고 부실공사는 사라지지 않고
1990년대에 성수대교,삼풍백화점 붕괴 참사로도 이어졌다.
당시 서울시장 김현옥의 사과문
"머리 숙여 5백만 시민에게 사과를 드립니다.
8일 새벽 와우지구의 참사가 귀중한 생명을 앗아 가고 시민의 마음을 앗아간 데 대해서 본인은 가눌 수 없는 슬픔 속에서 거듭거듭 사과를 올립니다. 그런 끔찍스런 재화를 이 서울에서 발생케 했다는데 대한 책임을 통감하며 앞으로 어떻게 이를 보상할까 하는 마음 절실합니다.
이미 사망하신 분의 영(靈)을 달래기 위해서 유족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서 부상자의 보다 빠른 쾌유를 위해서 이재민의 보다 신속한 구호와 안전한 타 아파트에의 입주를 위해서, 어떻게 하면 최선을 다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본인의 가슴은 꽉 차있습니다.
사망하신 분의 명복을 빌면서 유가족과 이재민, 상처를 입은 시민들에게 거듭 사과를 올리며 시민 여러분의 단죄를 기다리는 심정 간절합니다.
죄송합니다. 피와 눈물이 어린 충정으로 사과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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